을목이라는 것
을목은 풀과 덩굴이다. 큰 나무처럼 혼자 서지 않고 기대면서 오른다.
상황에 맞춰 모양을 바꾸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것이 약함이 아니라 방식이다.
버티는 힘이 길다. 빨리 가는 사람보다 멀리 가는 쪽에 가깝다.
을목은 오행으로 목(木, 뻗어 나가는 힘)에 들고 그중 음(陰)의 자리다. 같은 목의 양간은 갑목이고, 을목의 네 철에 적은 조후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일간과 계절 첫 장에 적었다.
봄(春) — 가시 돋친 장미
장미는 한 대에 봉오리를 여럿 달고, 그대로 두면 전부 작게 핀다.
할 수 있는 것이 여럿이라 고르지 못하고 다 쥐고 있는 철이다.
가시는 지키려고 돋은 것이다. 무섭게 보이려고 돋은 것이 아니다.
봄의 을목에게 모자란 것
화·수볕도 물도 아직 덜 왔다
봄 목은 해가 있어야 꽃이 벌고 물이 있어야 마르지 않는다.
여름(夏) — 반나절 피는 나팔꽃
나팔꽃은 새벽에 피었다가 해가 오르면 오므린다. 하루가 반나절이다.
빨리 붙잡는 대신 오래 못 연다. 그것이 게으름으로 오해받기 쉽다.
감고 오를 것이 있어야 선다. 혼자 서기보다 기댈 것이 있을 때 더 잘 오른다.
여름의 을목에게 모자란 것
수한낮을 견딜 물이 없다
여름 목은 잎이 얇아 먼저 탄다. 물이 있어야 낮까지 연다.
가을(秋) — 벽 타는 담쟁이
담쟁이는 봄부터 벽을 타고 오르다가 해가 짧아지는 가을에야 붉어진다.
기대는 것으로 보이지만 벽이 헐리면 붙어 있던 자국이 그대로 남는다.
잎을 다 떨궈도 줄기는 벽에 붙어 있다. 그 자리를 안 옮긴다.
가을의 을목에게 모자란 것
화·수물들일 볕도 스밀 물도 모자라다
가을 목은 쇠에 눌린다. 볕이 쇠를 눅이고 물이 뿌리를 돌린다.
겨울(冬) — 밟아야 사는 보리
보리는 뿌리가 들뜨면 얼어 죽는다. 그래서 일부러 밟아 준다.
눌린 자리에서 더 붙잡는다. 편하게만 둔 해에는 도리어 더디 클 수 있다.
위로는 아무것도 안 자라는 철이 길다. 밑에서는 뿌리를 벌리고 있다.
겨울의 을목에게 모자란 것
화곁에 둘 작은 불을 기다린다
겨울 목은 언 풀이다. 물은 이미 넘치니 불이 있어야 산다.